제목 | 트라브존 (TRABZ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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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윤여행사 |
작성일 | 17-03-07 20:39 |
동쪽에 기레순(GIRESUN)과 리제(RIZE), 남쪽에는 규무쉬하네(GUMUSHANE) 그리고 북쪽에는 흑해를 경계로 하고 있는 트라브존은 따뜻하고 강우량이 많은 기후 때문에 수목이 무성하고 산들의 협곡이 바다까지 이르고 있다. 면적은 4,685㎢에 이르며 기후는 지중해성에 가깝다. 주요 생산물은 밀, 해즐너트, 오렌지, 레몬, 귤, 올리브 그리고 차(Tea)이다. 광대한 목초지는 가축을 기르기에 안성맞춤이어서 버터의 생산술이 발달되었다.
트라브존이란 도시 이름이 어디에서 왔을까? 하나의 전설이 있는데, 어느날 한 남자가 전속력으로 말을 타고 이 유쾌하고 조그마한 마을로 와서 바로 대장간 앞에 섰다. 그리고 "지금 즉시 말발굽의 편자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대장장이는 조용히 4개의 편자를 만들어 주면서 말했다. "자, 용감하신 분 이것들을 보시고 마음에 들면 즉시 당신의 말발굽에 끼우세요." 남자는 편자를 조사하면서 비틀어보고 난 후 말했다. "나는 진짜 편자를 원해요. 주석 편자는 싫습니다." 강한 주석을 한 손으로 비트는 것을 보고 대장장이는 진짜 철재 편자를 만들어 그 말에 씌워 주었다. 남자는 대가로 하나의 금화를 주었다. 그러자 대장장이는 금화를 받아본 후 즉시 금화 위에 새겨진 글자를 없애버리고 "이 금화를 도로 받으시고 내게 더 좋은 금화를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남자가 다른 큰 금화를 주자 대장장이는 즉시 손으로 그 글자를 지워버렸다. 이 힘에 놀란 남자는 "너의 말을 타고 나를 따르라. 너는 너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곳에 있을만하다." 사실 이 때부터 이 도시는 투우라보잔(Tugra bozan-글자를 지우는 곳)으로 불려졌고 그 후에 트라브존(Trabzon)이 되었다.
트라브존의 역사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이 지방은 구석기 시대인 70,000 BC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그 후 청동기를 거쳐 2,000 BC에 백인종의 유목민 그룹이 이곳에 이주해 왔다.
제일 첫번째로 정착한 민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튜란족(우랄알타이어족)이었으며, 그 후에 힛타이트족, 앗시리아족, 밀레토스족들이 거쳐 가면서 역사가인 크세노폰(427-335BC)에 의하면 "일 만 명의 그리스 병사들이 페르시아와 싸우기 위해 소아시아로 왔다. 그러나 전쟁에서 그리스군의 사령관 Kuros가 사망하자 살아남은 8,600명의 병사들은 트라브존으로 왔다." 그래서 Trapesus란 트라브존의 옛날 이름이 이들 병사들의 정착지가 되므로 인해 역사에 기록되었다.
BC 334년 알렉산더 대제가 소아시아 지방을 정복했을 때 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가 BC 298년에는 폰투스 왕국이 통치권을 잡자 조선소와 목재를 공급하는 주요 항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로마의 세력이 확장되자 자연히 로마의 통치권으로 들어가서 1세기 후반에 트라브존은 급신장하여 로마의 페스파시아누스(AD 67-79) 황제 때에는 메소포타미아와 동부 소아시아와 페르시아를 연결하는 도로가 건설되었다. 그래서 트라브존은 새로운 무역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드리아누스(117-138 AD) 황제 때에는 그의 이름으로 항구를 건설하는 등 히포드롬, 극장, 요새, 수로 등이 또한 건설되어 도시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동안 트라브존은 종교적인 센터로서 많은 교회와 수도원들이 건설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물을 도시로 끌어 올리고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는 등 이 도시는 재건설되었고 11세기에는 군사기지로서 더욱 중요성을 얻었다.
13세기 후반에 트라브존은 흑해와 페르시아간의 무역 루트에서 중요한 항구가 되었고, 몽고인이 힘을 잃었던 14세기 초에 투르크 민족의 세력이 강대해 졌다. 1453년 콘스탄티노풀(현 이스탄불)이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에 떨어지고, 1461년 10월 26일 트라브존이 정복되었다.
그 후 세계 1차 대전 중 1916년 4월 14일에 러시아가 트라브존을 침략했다. 그러나 1918 년에 다시 찾게 되고 1차 대전에 승리한 연합군은 이곳에 폰투스, 그리스 국가를 설립하려 했지만 터키인에 의한 독립전쟁으로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역사적인 유적지 유적으로는 선사시대, 비잔틴 제국시, 그리고 오스만 제국 때의 것들이 있다.
1) 수멜라수도원 (SUMELA MONASTERY (Virgin Mary Monastery))
트라브존시에서 남쪽으로 54Km 지점, 해발 1,628m의 지가나(ZIGANA) 산 위의 동굴 속에 건설되었다.
수멜라란 이름은 그리스어 "MELAS" 검고 어두운이라는 뜻에서 왔다. 어두운 색깔의 마리아 성상과 산의 골짜기와 경사면이 이름에 미치는 주요한 요소들이었다. 검은 색깔은 코카사스 지방의 신비스러운 얼굴 모습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바깥쪽 입구에 1360년에 새겨 진 다섯 줄의 비문이 있다.
"왕은 동부와 서부의 주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이 수도원의 건립자다" 게다가 1361년 황제는 수멜라에서 일식을 보았다. 그래서 왕은 그의 동전 한 면에 태양을 찍어 넣었다. 이슬람이 국교인 오스만 제국 시에는 수멜라 수도원의 권리는 술탄(황제)들에 의해 존중되고 보호되었다. 수도원은 18세기에 재건되었고 19세기에 가장 융성하였다. 20세기에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그리스인들은 떠났고 이 수도원은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다.
1972년에 트라브존 박물관이 이 수도원을 인수하고 복구작업을 벌였을 때까지 이 공백 기간 동안 모자이크는 파괴되었고 해외로 밀반출 되었으며 대부분의 보물들은 사라지고 없어졌다.
# 수도원의 전설 중 하나를 소개한다면 : 복음전도주의자 중의 한 사람인 누가(LUCE)에 의하여 만들어진 성모마리아의 성상이 어찌어찌하여 아테네로 갔다. 그러나 어느날 이 성상은 아테네를 떠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 성상은 천사들이 날아와서 지가나 산 꼭대기에 있는 동굴에 안치되었다. 그런데 이곳에 살기 위해 아테네에서 왔던 수도사 바나바와 그의 동료가 이 성모의 성상을 보았고 그들은 이곳에 수도원을 짓기로 했다.
1840년 J.P Fallmerayer가 수멜라 수도원을 탐사한 끝에 이 성상을 찾아내었는데 그는 이것에 대해 수도사들의 말을 들은 후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이슬람 인들이 마리아의 성상을 없애 버리기 위해 태워버리려 했지만 불타지 않았고, 도끼로 쪼개어 버리려 해도 쪼개지지 않았다. 그래서 시냇물에 버렸지만 이 성상은 물에 떠내려 가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마리아 성상에 금이 가 있는 것은 도끼로 찍은 상처다>
하지만 이 성상은 최초의 성상이 아니라 17세기경 트라브존의 예술가들이 만든 것이 아닐까?
2) 트라브존 성벽 비잔틴이 건설되었으며 상부, 중부, 하부의 성벽으로 나뉘어져 있다.
3) 악차칼레(악차 성)
비잔틴 왕 ALEXIUS (1297-1330)가 셀쭉 터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은 성벽.
4) 교회 유게니우스교회, 하기야 소피아교회, 성시바스, 성필립교회, 성미카엘교회, 동굴교회, 산타마리아교회(산타 마리아교회 - 술탄 압둘 메지트의 명에 의해 1869-1874년 사이에 지어진 교회로서 트라브존을 방문하는 외국인 신자들을 위해 지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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