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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해 연안 지역

제목 에페수스 (EPHESUS) - 성서상의 에베소
작성자 윤여행사
작성일 17-03-0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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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명 - 셀축(SELCUK), 성서명 - 에베소 v 관련성경 - 행 18:19


"인류 문화유산 중 가장 화려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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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hesus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사료는 기원전 13세기경 Hittite(힛타이트, 성경에 햇족) 비문에서 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렸던 도시이다. 그러나 역사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리디아(Lydia)왕국의 크로수스(Croesus)왕이 이 도시를 기원전 560년 에 처음으로 침략하면서이다.

 

그 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사이의 각축장으로 변해 때로는 파괴되고, 때로는 융성하면서 영고성쇠를 거듭했다.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유명한 델로스(Delos)동맹이나, 그리이스의 도시국가와 페르시아 간의 펠레폰네소스(Peloponnesos) 전쟁도 이 시기에 에페스가 위치한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의 에페스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평온을 되찾고 융성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는 그의 장군 중에 한 사람이었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피온산 기슭에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명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바로 이 시대 때부터의 유적이다.

 

그 후 로마가 지배하면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뭄(Pergamum)에서 이 에페스로 옮기고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나갔다. 안토니우스가 그의 정적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트스 황제)와 대치하던 중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기원 후 1세기에 에페스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7-8세기 들어와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으로 떨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잦은 지진과 이 지역을 흐르는 멘델레스 강의 범람으로 지각 변동에 의해 오늘날 바다는 이곳에서 5Km떨어진 쿠샤다스 지역까지 밀려나가 오늘날은 내륙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v 사도요한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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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페스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또한 사도 바울도 그의 2,3차 전도 여행에 에페스를 방문하여 선교를 하면서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페스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지중해 연안의 파트모스(성서에 밧모섬)섬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대리석을 채취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계시록"을 쓰게 된다. 그 후 도미티안 황제가 피살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에페스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비잔틴제국 시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 요한의교회(The Church of St. John)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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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셀축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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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요한의 교회 북쪽으로 언덕 위에 높이 솟아있는 이 성은 원래 비잔틴 시대에 지어졌으나 후에 터키인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해 요새화 하였다.

 

v 이사베이(Isa bey)모스크


사도요한 교회의 서쪽 끝에서 내려다 보이는 이사베이 모스크는 1375년 셀축 투르크의 술탄인 이사베이에 의해 세워졌다. 많은 부분이 지진으로 손상되었지만 그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 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이다.

 

v 아르테미스 신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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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Artemis-성서의 아데미))신은 원래 달의 여신으로 로마 신화의 다이아나(Diana)여신에 해당된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의 지중해 도시국가에서는 아르테미스가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이 되었다. 이 여신의 가슴에 있는 모습은 처음에는 유방의 모습으로 생각되었으나 후에 이것이 황소의 고환임이 판명이 되었다. 이것은 아르테미 신전에 바쳐진 황소의 고환을 묘사한 것인데, 고환은 "씨앗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 이다. 이 신상의 치마부분에는 사자, 황소, 스핑크스 등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아르테미스가 동물의 보호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세계 최초의 대리석 건물로서 127개의 기둥이 바치고 있는 처마도리(Architraves) 하나의 무게만도 24톤의 무게가 나가는데, 그 당시의 장비를 감안해 볼 때 어떻게 그러한 무게의 대리석을 기둥높이(17.65m) 까지 들어 올릴 수 있었을가? 이것이 아직도 불가사의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신전은 7차례나 파괴되고 재건되었으나 마지막으로 AD 125년 코트족(Goths)에 의해 파괴, 약탈된 후로 다시는 재건하지 못하고 이곳의 대리석은 사도요한의 교회와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을 짓는데 사용되어 오늘날 그 웅장한 자취는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한 개의 기둥만이 그 옛날의 영화를 말없이 전해 줄 뿐이다.

 

v 고고학 박물관


에페스 및 아르데미스 신전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모두 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그 역사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아르테미스 신상을 비롯하여 Eros의 조각, 소크라테스의 조각, 프레스코 벽화 등 이다.

 

v 잠자는 일곱 사람의 동굴


기독교 박해시대에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인들은 황제의 신전에 짐승을 제물로 바치고 황제의 신에게 경배하도록 강요 당하였다. 이를 거절한다면 이는 로마의 적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았다. AD 250년경 데시우스(Decius) 황제시대에 7명의 젊은 기독교 신자가 이러한 박해를 피해 이 동굴로 피신했다. 이들은 어느날 동굴에서 잠에 빠져 한동안 자다 일어나 음식을 구하기 위하여 시내에 나갔다가 자신들이 하루 밤이 아닌 200년간을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는 이미 기독교가 공인이 되어 로마제국 어디든지 기독교가 전파되어 있을 때였다.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이 사건을 전해 듣고, 당시 각 교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부활의 증거로 받아 들였다. 그 일곱 사람은 나중에 죽은 후 화려한 장례식과 함께 이 동굴에 다시 묻혔다.

 

v 성모마리아의 집


불불(Bulbul) 산 쪽의 산길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5Km의 산 꼭대기에 성모마리아가 말년을 보낸 성모마리아의 집이 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죽기 전 (요한복음 19장 26-27절) 요한을 가르키며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다시 마리아를 가르켜 요한에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그 후 431년 에페스에서 열렸던 종교회의의 의사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예수가 죽은 후 4-6년 뒤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에페스로 와서 Coresus 산(현 불불산)) 위에 집 한 채를 지어 드렸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모 마리아가 말년을 보냈다고 하는 집의 장소는 잊혀져 가고 폐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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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Catherine Emmerich 라고 하는 독일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1878년 "성모마리아의 생애"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성모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891년 융이라는 신부의 인솔아래 에페스 남쪽의 산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이 결과 오늘날의 성모마리아의 집이 밝혀졌는데, 발견 당시의 집터의 모양은 책에 기록한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더욱이 이 수녀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어 그 계시 내용의 신빙성을 더욱 크게 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곳을 성지로 공식 선포했으며, 1967년 교황 바울로 6세 및 1979년 교황 요한 바울로 2세도 이곳을 방문했다.

 

발굴 당시 이 건물은 오직 집터와 일부 벽만 남아있었다. 그 위에 현재의 모습의 건물을 복원시킨 것인데 붉은 선이 그어져있다. 본당의 바닥에는 회색으로 되어 있는 부분은 난로가 놓여져 있던 곳이다. 그곳에서 발굴된 석탄을 과학적으로 측정해 본 결과 성모 마리아 당대인 1세기의 것이었다고 한다. 집 아래쪽에는 샘이 있어서 이곳을 찾는 순례 객들은 성수로 자기 고장의 교회나 성당으로 가져가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

 

v 성모마리아의 교회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곳은 AD 431년 이곳에서 제3차 종교회의가 열려 기독교의 교리를 토론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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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이 나중에 소요를 이르키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에페스에서 종교회의를 열 것을 명령해 약 200여명의 권위자들이 약 3개월에 걸쳐 토론한 끝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파문 시켰다. 이 교회는 원래 2세기에 지어져 고등교육기관으로 쓰여졌다가 4세기에 교회로 바뀌었다.

 

v 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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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온산 기슭의 비탈을 이용해 건설된 이 극장은 오늘날 볼 수 있는 모습은 트라이안(Trajan)황제 시대의 모습이다. 이 건물은 정교한 음향학적 구조로 되어 있어 배우가 작은 소리로 대화를 해도 관중석 끝자리의 사람도 모두 알아 들을 수 있었다 한다. 각 단은 22줄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24,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곳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곳으로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이곳에 들러 선교를 하다 에페스의 은 세공장이들로터 수난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v 대리석 도로


대극장과 셀수스 도서관을 잇는 이 도로는 크고 고른 대리석이 깔려 있어서 대리석 도로라 불리 운다. 네로 황제 시대에 2m 높이 둑을 쌓아 회랑을 만들었다. 원래 이 회랑의 벽에 이용되던 벽돌은 철이나 아연으로 된 꺽쇠를 박아 연결시켰는데 비잔틴 제국시대에 에페스가 경제적으로 허약해 졌을 때 이 꺽쇠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모두 제거되어 지금도 그 파인 구멍이 흉하게 남아있다.

 

또한 시장쪽 도로변의 바닥에는 한 여인의 얼굴 모습과 왼발(이 크기보다 작은 미성년자는 사절) 그리고 하트 모양의 그림과 아코로디아(나를 따라오세요)라는 문자와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구멍(돈을 가져오세요)을 뚫어 놓았다. 이것은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창녀 촌을 광고하는 모습이다.

 

v 세라피스(Serapis)신전


시장터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신전은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를 숭배하던 신전으로 2세기에 로마의 안토니우스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에페스가 항구도시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밀접한 무역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문화교류가 활발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v 아고라(Agora)-市場


가로 세로 110m의 넓은 터로 되어 있는 이 아고라는 에페스 도시 생활의 중심지였다. 청동, 구리제품, 등잔을 비롯한 많은 도자기 제품, 아라비안산 약용식물, 포도주, 꿀, 고기, 비단, 보석 등이 거래되었다. 로마시대에 아고라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사람들은 밭에서 입는 옷을 입고 아고라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v 셀수스 도서관(Celsus)


쥴리우스 셀수스는 소 아시아주의 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하였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에 소장되어 있던 수 천 권의 두루마리책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

 

v 스콜라티스티카(Skolatistika) 목욕탕


3층으로 되어있는 이 구조물은 에페스 도시에서도 큰 건물 중에 하나이다. 1세기에 지어져 4세기 말까지 계속 수리되면서 변형되어온 이 건물은 400년에 이 목욕탕의 수리를 담당한 기독교인 스콜라티스티카(Skolatistika)의 이름을 따다가 명명했다.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 할 것 없이 모두 이 목욕을 즐겼으며, 목욕탕은 로마제국 시대에 있어서는 문화생활의 중심지였다.

 

v 공중변소


구멍을 낸 대리석 판으로 50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사용하던 개방적인 변소로 스콜라티스티카 목욕탕으로부터 나온 물이 씻어 내려가게 위생적으로 고안되어 있다. 좌석 정면에 있는 수로는 깨끗한 물이 흘러 용변을 본 후 이용할 수 있게 되어있다. 아마도 용변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v 하드리안(Hadrian)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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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테스 도로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이 건물은 138년경에 지어져 하드리안 황제에게 바쳐졌다. 아치문에는 행운의 여신 니케의 조각상이 있고 그 뒤 반원형에는 메두사의 조각상이 있다.

 

v 트라이안(Trajan)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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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테스 도로 북쪽 끝에 위치한 12m 높이의 이 우물은 트라이안 황제에게 바쳐졌다. 우물 중앙 받침대 위에는 트라이안 황제의 동상이 있었고 그 발목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받침대와 오른발 한쪽만 남아있다.

 

v 헤라클레스(Heracles) 문


구레테스 도로가 끝나는 부분에 위치한 이 기념 문은 2층의 구조로 되어있었다. 여기에 있는 두개의 기둥에는 Nemea,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Heracles의 모습이 부조 되어 있어서 이 문을 헤라클레스의 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네미아 골짜기에 사는 사자를 죽였다고 하는데 이 사자를 죽이는 일은 이 세상에서 12가지 어려운 일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이 문은 귀족과 평민의 경계선이 되었다.

 

v 구레테스(Curetes)


그리스 신화에 원래 구레테스는 반신반인의 인물이었다. 레토(Leto)가 제우스의 아이를 잉태하여 쌍둥이로 아폴로(Apollo)와 아르테미스(Artemis)를 낳을 때, 레토를 시샘하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구레테스들은 그들의 무기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레토가 해산할 때 지르는 소리가 안 들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에페스에서 구레테스하면 아르테미스 신전의 업무에 종사하는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승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도로의 양편에는 기둥으로 이어진 회랑이 있고, 이 회랑 뒤로 가게 및 개인 주택들이 있었다. 이 기둥중의 하나가 유명한 물리학자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비문이 새겨져 있다.

 

v 도미티안(Domitian) 신전


역사상 에페소는 4차례의 네오코로스(Neokoros)가 될 자격을 얻었다. 네오코로스가 된다는 것은 황제의 신전에 파수꾼이 된다는 것으로 다른 도시들이 모두 부러워 할만한 특권이었다. 에페소는 처음으로 도미티안(81-96년)에 대한 신전의 파수꾼 역할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의 한 하인에 의해 암살 당하자 에페스인들은 어렵게 얻은 네오코로스의 권리를 잃을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의 아버지 베스파시안(Vespasian) 을 신으로 모셔 이 신전을 그에게 바쳤다. 도미티안 황제는 사도 요한을 로마로 불러 고문을 가한 후 파트모스(밧모섬)로 유배 시켰던 황제이다.

 

q 에페스가 Neokoros 얻을 수 있었던 시대

1. Domitian 황제(81-96)
2. Hadrian 황제(128)
3. Elagabalus 황제(218-222)
4. Valerian 황제(251-260)

 

v 프리타니움(Prytaneium)


로마제국시대에 에페스는 "자유도시(Civitas libera)" 였다. 즉 도시의 행정과 관련된 모든 공직은 명예직이었다. 따라서 도시의 중요한 축제나 행사에 드는 경비나 공공 건물의 건축 및 보수에 소요되는 경비는 시민들이 스스로 담당했다. 그들은 이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이것을 기리기 위한 희사자들의 동상과 비문이 시장터나 주요 도로변에 세워진 것이다.

 

도시에서 종교적으로나 행정적으로 가장 높은 지위는 프리탄(Prytan) 직위였다. 프리탄의 주요 임무는 프리타니움에 위치해 있던 도시의 성화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었다. 프리탄들의 또 하나 중요한 임무는 도시 내에 있는 성소를 감독하는 일이며 일상의 제물로 쓰이는 동물을 공급하는 것인데, 이 경비도 프리탄 스스로 부담했다. 이 지역은 시정과 종교를 통치하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v 오데온(Odeion)


이 음악당은 극장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어 소 극장이라 불리기도 한다.

 

에페스에 정치 조직은 두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보울레(Boule)라고 불리는 원로원(상원에 해당-300명으로 구성)으로 바로 이 소극장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또 하나의 그룹은 데모스(Demos) 라고 불리는 민회로서 모든 에페스인으로 구성되어있고 이들은 대극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 소극장은 또한 음악 등 문화적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는데 총 1천5백 명을 수용하였으며, 가장 낮은 부분인 오케스트라의 중앙에 빗물을 받는 홈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 지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귀족 전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