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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나돌루 지역

제목 카파도키아 (CAPPADOCIA) - 성서상의 갑바도기아
작성자 윤여행사
작성일 17-03-04 03:34

v 현지명 - 네브쉐히르(Nevsehir),

성서명 - 갑바도기아
v 관련성경 - 베드로전서 1:1, 사도행전 2:9, 히브리서 11:37-38

 

"우리의 눈은 기절 초풍할 정도로 화들짝 놀라, 주변의 환상적인 풍경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1907년 여름, 최초로 이 지역의 성지를 발굴해 낸, 프랑스의 예수회(Jesuit) 회원이자 학자인 Pere cuillaume de Jerphanion이, 강렬한 태양에 늘어진 지친 몸을 말 등위에 실은 채, 이 카파도키아 지역에 들어서다 터트린 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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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괴레메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여행의 피로와 더위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한 환상적인 파노라마를 담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룩할 수 없는, 오직 신의 능력과 자연의 조화로만 이를 수 있는 이 카파도키아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함으로서 여행자들의 발길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이 카파도키아 지역은 현재 터어키 영토인 소아시아 반도(일명 Anatolia) 중앙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의 평균 고도는 해발 1,000m로서 주변이 높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즉, 과거에 화산을 분출시킨바 있는 에르지에스(Erciyes 3,900m), 핫산(Hasan 3,200m), 괼류(Gollu 2143m) 등의 높은 산들이 카파도키아를 굽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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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백 만년 전 이 산들은 차례로 용트림을 치며 용암을 분출시켜, 주변의 지형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화산에 의해 이루어진 이 지형은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비, 바람에 의한 침식 작용으로 오늘날과 같은 대 작품이 이루어 진 것이다. 즉, 화산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 지역이 강도가 약한 사암으로 되어 있었으나, 화산에 의해 그 위로 강도가 강한 검은 용암이 뒤덮여 졌다. 세월의 비, 바람은 강도에 따라 이 지형을 깍고 다듬어 전 세계에서도 유일한 특수한 경치를 이 카파도키아에 선사한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지형은 인간들에게 손쉽게 지을 수 있는 거주지를 제공해 주었다. 즉, 그들은 이 천연의 바위 속에 있는 약한 사암을 파내기만 하면 훌륭한 집이 되었고, 그 겉을 둘러싸고 있는 강도가 강한 용암은 지붕이나 벽이 되어 주었다.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기초공사나 골조공사는 필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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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200년경, 힛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후 이 지역이 역사적 기록으로 최초로 남기 시작한 것은 동쪽으로부터의 페르시아 제국이 침략하면서이다. 그 후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의 침입으로 카파도키아는 헤레니즘 문명을 맞게된다. 기원 후 17년에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로마나 비잔틴 제국의 어느 황제들도 이 지역의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곳은 단지 동서와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관계로 대상들의 숙소로 요긴한 지점이 된 이외에는 역사적으로 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특수한 지형은 기독교인들에게는 훌륭한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혹은 7세기 말경엔 아랍인들의 침략을 피해 이들은 이곳에 굴을 파고 거주하면서 암굴 속에 새로운 기독교 문명을 남겨 놓았다. 특히 비잔틴 시대에는 당시의 성직자들의 은둔생활 풍조에 따라 많은 암굴 수도원이 건설되기도 했다. 이 지역은 출중한 신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가바도기아 학파]까지 이루었다. 특히 4세기 때 활동했던 "바실"이나 "그레고리" 같은 사람들은 기독교 정통교리와 신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신학자이다.  


그 후 터키 공화국과 그리스간의 협정에 따라 이 지역에 거주하던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자의에 의해 그리스로 이주해 감으로서 오늘날은 그들이 남겨놓은 문화적 흔적만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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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눈길을 끄는 흥미로운 시몬의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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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를 의미하는 3개의 갓이 있는 바위를 파고 생활한 주두행자(the stylite)들은 벽에 그들의 존경의 대상 던 시몬의 벽화를 그려 넣음으로서 시몬의 수도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벽화의 내용은 시몬과 그의 어머니, 용을 치료하고 있는 시몬, 시몬과 밧줄 등이다. 성 시몬 (St. Symeon the stylite 390-459)은 주두 고행생활의 창시자이다. 로마의 박해시절부터 자기희생과 헌신, 순교로만 이어지던 기독교인들에게 갑작스런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과 신앙의 자유는 일시적인 당황을 갖게 했다. 자기 희생에 익숙해 있던 이들은 이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의 고행 및 은둔생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시몬으로서 그는 안티옥(지금의 Antakya, 성서상의 수리아 안디옥)지방에서 살았다. 스스로의 고행을 위해 좁은 굴속이나 속이 빈 우물 속에 들어가 생활을 해본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산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의 몸을 바위의 쇠사슬에 묶어놓고 생활해 보나 또 이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이번에는 방랑생활을 시작해 본다. 그에게는 환자, 불구자 혹은 조언을 구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는 이들 사람들을 피해 이번에는 기둥을 생각해 내었다. 즉 수평적 탈출이 어려워지자 이번에는 수직적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3단의 기둥을 쌓고, 그 꼭대기에 겨우 자신만이 설 수 있는 공간 속에서 생활했다. 왕이 조언을 구하기 위하여 찾아오면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야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기둥꼭대기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거나 조언하며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