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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나돌루 지역

제목 앙카라 (ANKARA) - 성서상의 갈라디아
작성자 윤여행사
작성일 17-03-04 03:29

배의 닻을 의미하는 터키의 수도 ANKARA(앙카라)

 

앙카라는 터키 공화국의 수도로서 소아시아 반도의 동서와 남북을 연결하는 교차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앙카라는 높고 메마른 소아시아 고원 위에 4개에 산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해발 850-120미터에 사발모양으로 된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둘러싸고 있는 산들 사이에 3개의 강물이 흐르고 있으며 기후가 여름은 덥고 강우량은 많지 않으며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5월이 비가 가장 많이 내리는 달이고 인구는 400만명 이상으로 이스탄불에 이은 제2의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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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인 관계로 공업화된 도시는 아니며 문화적인 활동이 많은 도시로서 유명한 대학들이 인재를 양성하고 있고 국립 예술학교, 국립 교향악단, 국립극장 및 오페라, 발레단의 고향이며 수많은 민간 극장, 화랑, 도서관들이 앙카라 시민들의 문화 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다.

 

- 앙카라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면 -

 

선사시대의 유적이 앙카라와 그 인근지역에서 발견된 것은 이 지역에 고대로부터 인류가 살아왔다는 것을 가리켜 준다. 구석기 시대에 속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에티욕쿠슈(ETIYOKUSU)의 거류지와 에르가지(ERGAZI), 말테페(MALTEPE)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작은 궁전의 유적은 앙카라의 남서쪽에 있는 아흘라틀르벨에서 발견되었다. 그 후 앙카라나 그 주변 지역이 히타이트족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히타이트족의 거류지가 뮤트레드 평원(MUTRED PLAIN)근처의 빗틱(BITIK)에 있었고 아름다운 히타이트의 색깔이 화려하고 돋을 새김 되어있는 화병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60KM 떨어진 가부르 성(GAVUR KALESI)은 히타이트 족의 신을 경배하는 지역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도시는 프리지아의 왕(왕이 손을 대는 것은 모두 황금으로 변했다는) 마이더스에 의해서 세워졌다고도 전해진다.

 

프리지아족들이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이 땅에 정착할 때 바다를 그리워하는 표현으로 이 도시를 배의 닻(ANCHOR)을 의미하는 앙키라(ANKYRA)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므로 앙키라의 중요한 첫 번째 거주역사는 프리지아 시대였다(750-500 BC). 또한 이 도시는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522-486 BC)재위 시에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에서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던 사르디스에 이르는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황제의 도로가 통과하고 있어서 중요한 무역의 중심지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소아시아 반도를 점령할 때에 프리지아의 수도 고오디온 (GORDION)에서 334-333 BC의 겨울을 보내면서 고오디온의 매듭을 끊기도 했다. 그리고 봄에 이 도시로 이동하여 가을까지 페르시아군을 기다렸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서 이 도시는 페르시아의 태수가 통치하는 지역과 프리지아가 관할하는 지역으로 양분되기도 했으나, 안티고노스(ANTIGONOS)장군에 의해서 301 BC까지 점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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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277BC에 갈라디아 부족(GALATIAN TRIBES)이 세 갈레로 나누어 유럽에서 소아시아 반도로 들어와서 앙키라(ANKIRA)와 페시누스(PESSINUS) 근처에 있는 크즐르러막 강(KIZILIRMAK)근처에 아치형으로 거주했고 수도를 앙키라로 정했다.

 

갈라디아 인들은 도시의 중심지와 도시 외곽의 요새 및 촌락에 살았고 양을 치거나 타 민족을 약탈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그들대로의 통치방식이 있었고 많은 타 부족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조약도 많이 맺었다. 갈라디아 인들이 이 곳에 정착생활을 했다는 정보는 많은데 로마의 장군 만리우스 불소(MANLIUS VULSO)가 앙키라로 와서 갈라디아인을 쳐부순 189 BC까지는 이 도시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때 로마 장군 불소는 갈라디아인들이 약탈행위를 중단하고 그들의 영토 안에서 얌전히 살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페르가뭄 왕국의 통치 하에 두는 것에 동의했다.

 

133 BC에 페르가뭄 왕국이 로마에 귀속되었을 때 프리지아의 땅 안에 남아있던 갈라디아는 폰투스 왕국에 주어졌지만 폰투스 왕국은 앙키라 근처의 땅까지 세력을 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25 BC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갈라디아를 로마 통치 하에 두었고 앙카라는 갈라디아 주의 수도가 되었다. 로마의 유럽에 대한 동쪽 국경을 연결하는 교차로로서 전략적인 요충이므로 로마통치하의 앙키라는 급속히 발전했고 왕과 군대가 휴식을 취했던 주요 군사기지가 되기도 했다.

 

3세기 초기에 카라칼라 황제는 앙카라 성을 보수하고 성의 기슭에 로마식 목욕탕을 지었다. 그러나 3세기 후반에 로마제국의 정치불안은 도시의 발달을 저해했다.그렇지만 4세기 중엽에 기독교가 소아시아 반도에 전파되자 이 도시는 중요성을 되찾았고 종교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314년과 458년에 바티칸 공의회가 여기서 열렸고 많은 중요한 종교적인 결정이 이루어졌다.

395년 로마가 동과 서로 분리되었을 때 이 도시는 동 로마에 속하게 된다. 비잔틴 제국의 통치 하에서 앙키라는 7세기에 아랍 족의 침략을 받을 때까지 평화로운 세월을 보냈다.

 

그런 후 약 200년 동안의 비잔틴 제국 하에서 평화를 누렸다. 셀쭉 투르크의 술탄 알파슬란(ALPASLAN)이 1071년 말라즈기르트(MALAZGIRT)의 전투에서 비잔틴 군을 물리쳤고 1073년에 앙키라는 투르크 족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1101년 십자군 전쟁기간 중 이 도시는 비잔틴 제국이 다시 빼앗게 되며 비잔틴 제국의 동쪽 국경 요새로서 역할을 한다. 장기간의 셀쭉 투르크 통치 하에 앙키라는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몽고군이 셀쭉 투르크를 침략한 동안 앙키라도 많이 파괴되었다.

 

1243년에 시작하여 셀쭉 투르크 국은 몽고군에게 영토를 많이 빼앗기고 통치자는 힘을 잃었다. 마침내 1304년 앙키라는 몽고군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몽고의 감독 하에 아히베이(AHI BEYS)라 불리는 총독에 의해 행정업무가 관장 되었다. 이슬람 통치기간동안 앙카라의 이름은 에르구루(ERGURU)나 앙고라(ANGORA)로 개명되었다. 1402년에 티무르가 소아시아를 침략했고 소아시아에서 철수할 때까지의 소요기간 동안 이 도시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 확장동안 앙키라는 소아시아 주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소아시아 반도의 다른 도시들처럼 오스만제국이 기울어져 가는 동안 앙키라에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기간동안 앙키라는 무역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유지했다. 특별히 앙고라 염소 털과 여러 종류의 직물이 주요 무역 물품이었다. 무두질(제혁업)이 또한 인기 있었고 포도 농원이 많았다. 오스만 통치기간동안 수많은 유럽의 명사들이 다녀갔고 첫 번째 도시계획은 1839년에 프러시아의 관리 봔 빈체 (VON VINCHE)에 의해 이루어졌다. 19세기에 앙카라라고 불리며 그저 하나의 크고 평화스러운 도시였다. 1892년에 이스탄불과 철도로 연결되었지만 여전히 조용한 도시로 남아있었다.

 

오스만제국의 몰락과 이어진 독립전쟁 기간동안 이 도시는 중요성을 되찾았고 독립전쟁의 승리 후인 1923년 10월 13일에 오늘날의 앙카라는 터키 공화국의 수도가 되어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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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인 차탈효육에서 발굴된 세계최초의 (BC 6200)벽화, 프리지아의 마이더스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히타이트 제국시의 유물 등 진귀한 유적들을 소장하고 있는 소아시아 문명 박물관, 로마시대의 아우구스투스 신전, 로마시대의 목욕탕, 15미터 높이의 줄리엔 기둥(JULIEN COLUMN), 앙카라 성벽, 셀쭉 시대에 건축된 악 다리(AKKOPRU), 6.25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위령 탑이 있는 한국공원, 근대 터키 공화국의 아버지 아타 투르크의 영묘 등이 있어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관광할 만한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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