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현지명 - 셀축(SELCUK), 성서명 - 에베소
v 관련성경 - 행18:1~3, 18:18, 18:19~21, 19:1, 19:8~10, 19:25~27, 19:35~41, 20,
롬16:23, 고전15:32, 고후1:8, 6:4~10, 11:23~27, 계2:1~7
역사에서 에베소(Ephesus)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Hittite(성경의 햇족속)비문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렸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이다.
기원 후 1세기에 에베소는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도시중의 하나가 되었다. 37-42년 사이에 기독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바울은 그의 2차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벌이고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사도요한도 그리스도로부터 성모마리아를 돌 볼 임무를 부여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64년 사도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 당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서 에베소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버가모, 서머나 등 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지중해 연안의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했다. 요한은 이곳에서 계시록을 썼다. 로마황제 Domitian이 피살당하자, 요한도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그 후 요한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베소에 묻혔으며, 비잔틴 제국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요한의 교회]가 세워졌다.
7-8세기에 들어와 에베소는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에는 터어키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1. 박해의 문
이 문은 요한의 교회 앞에 세워진 것으로 대리석 부분을 에베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인데, 야수와 전사들의 결투를 즐기던 3-4세기의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이 경기장에서 야수들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이 경기장으로 달려가서 그 대리석들을 부수어 박해의 문을 지은 것이다.
2. 사도요한의 교회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된 교회가 건립되었다.
그 후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의 교회로 증축시켰다. 교회의 심장부인 본당은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 있고, 이곳에 사도 요한의 무덤이있다.
3. 에베소 교회 (성모마리아의 교회)
이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431년 이곳에서 제3차종교회의가 열리고 기독교 교리를 토론한 곳이다. 네스토리우스 (Nestorius)는 안디옥 교회에 있을 때부터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 하고 나섰다.
이 때 약 200여명의 성직자들이 3개월간 토론 끝에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는 이단으로 결정되었다. 이 회의록에는 성모마리아가 에베소에 왔으며, 이곳에서 살다가 묻혔다는 문구가 남아있다.
4. 마리아의 집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죽기전 요한을 가리키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다시 마리아를 가리켜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요 19:26-27) 그리하여 요한은 박해를 피해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오게 되며 제3차 종교회의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요한이 마리아에게 산 위에 집 한 채를 지어드렸다고 하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의 장소는 잊혀가고 폐허가 되어 찾을 길이 없었다.
그 후 1878년 캐더린 (Catherine)라고 하는 독일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성모마리아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펴냈는데, 이 책 속에 기이하게도 마리아의집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수녀는 자기가 태어난 고장을 한번도 떠난 일이 없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나자렛신부가 1891년 탐사반을 조직하여 오늘날의 성모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게 되는데, 집 터 모양은 캐더린이 기록한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이에 1961년에 이르러 교황 요한21세는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곳을 성지로 공식선포하였다.